도쿠가와 요시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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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도 막부의 15대 쇼군이자 마지막 쇼군. 그리고 '''일본 역사상 최후의 정이대장군'''이자, '''일본 역사상 최후의 전근대적 실권자'''.
2. 생애
2.1. 집안 내력과 출생
1837년 에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고산케의 미토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 어머니는 방계 황족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 출신인 요시코 여왕이다.[6] 요시노부는 나리아키의 7남으로 태어나 어릴 때 미토에서 성장했다. 7남임에도 다른 집에 양자로 보내지 않고 남겨두었는데, 이는 요시노부가 장남이자 후계자였던 도쿠가와 요시아츠와 함께 단 둘뿐인 정실 소생의 자식이었기 때문에 혹시 있을지 모를 장남의 죽음을 대비해서 대타로 남겨둔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1847년, 10살 때 막부에서 요시노부를 고산쿄의 히토쓰바시가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에 따라 히토쓰바시 가의 양자가 들어가서 12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요시에게 이름을 하사받아 히토쓰바시 요시노부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7] 이에요시는 병약한 도쿠가와 이에사다보다 요시노부에게 더 마음이 끌려 요시노부를 쇼군 후계자로 할 생각까지 가졌지만, 가신 아베 마사히로의 간언으로 뜻을 접긴 했다.
쇼군의 후계자로 기대받아서 어릴 때부터 제왕학의 영재교육을 받았다. 총명한 것으로 유명했다.
1853년, 미국 제독 매튜 페리의 함대가 에도에 나타나 개항을 요구하는 가운데 이에요시가 사망하자, 차차기 쇼군을 두고 후계자 다툼이 일게 되었다.[8] 로주 아베 마사히로, 사쓰마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 등의 소위 히토쓰바시 파는 요시노부를 지지했다. 반면 히코네 번주 이이 나오스케, 이에사다의 생모 혼쥬인를 중심으로 한 오오쿠의 난키 파는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지지했다.
그러나 히토쓰바시 파가 아베 마사히로,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잇달아 사망하면서 지리멸렬해졌고, 1858년 이에모치가 14대 쇼군이 되었다.
16살 때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추천하여 자신을 도쿠가와 종가의 후계자로 하려하자 요시노부는 '''"천하를 얻고자 하는 것처럼 귀찮은 일은 없다"'''라고 편지를 써보냈다고 하지만, 과연 야망이 정말 없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이런 가운데 다이로가 된 이이 나오스케가 고메이 덴노의 칙허도 받지 않고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자, 요시노부는 후쿠이 번주 마쓰다이라 슌카쿠 등과 함께 이이 나오스케에게 이를 따졌다. 그러자 이이 나오스케는 로주 마나베 아키카쓰를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막부에 반대하는 존황양이 세력과 히토쓰바시파를 숙청하는 사태를 일으켰다. 요시노부는 근신처분을 받는 정도였지만 요시다 쇼인 같은 인물은 처형될 정도로 100여 명의 인사들이 연루된 큰 옥사였다. 더불어 요시노부의 아버지인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번주직을 박탈당하고 칩거생활을 하다가 사망한다.
2.2. 청년기
2.2.1. 쇼군 후견직
그러던 1860년, 이이 나오스케가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사주를 받은 미토 번의 낭사(로닌) 집단에게 암살되었다. 공무합체파였던 사쓰마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뒤를 이어 사쓰마의 실권을 쥔 이복동생 시마즈 히사미쓰는 교토에 직접 상경해서 근신중이던 요시노부와 마쓰다이라 슌가쿠의 처벌을 풀어줄 것을 요구한다.
1862년, 히사미쓰의 의향대로, 요시노부는 쇼군후견직(将軍後見職)에 임명되고, 후쿠이 번주 마쓰다이라 슌가쿠가 정사총재(政事總裁, 다이로에서 이름만 바꿨다.)직에 임명되어 이들은 분큐의 개혁이라는 정치개혁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교토수호직이 신설되고, 다이묘들이 1년마다 에도와 영지를 번갈아 오고가야 했던 참근교대를 3년에 한 번으로 완화했다. 더불어 다이묘의 에도에서 체류기간을 100일로 줄이고, 볼모였던 처자식을 고향에 데려갈 수 있도록 허락했다. 사실상 참근교대의 폐지나 다름없었다.
2.2.2. 천황의 양이 실행
1863년, 229년 만에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상경하여 천황에게 양이를 맹세하는 것에 앞서 쇼군 후견직인 요시노부가 조정과 실무협의를 했다. 하지만 양이 맹세의 목적은 양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시 일고있던 '''도막파를 견제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요시노부는 조정에게 "기존대로 조정이 막부에게 모든 국정을 위임하던지, 아니면 막부가 국정행사권을 조정에 반납하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압박했다. 즉 도막파가 주장하는 행정권의 조정반납을 조정에서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9] 결국 조정을 통해 도막파를 견제한다는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정은 조정 나름대로 "막부의 국정운영은 인정하지만 천황이 직접 각 번에 명령을 내릴 권한도 있다"라고 맞서 결국 양이를 실행하라고 해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다. 마쓰다이라 슌가쿠가 이런 조정의 조치에 반발해 정사총재직을 사임하겠다고 밝히자 요시노부는 이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고 막부의 신료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요시노부는 절묘하게 양이를 피했는데, 고메이 덴노와 쇼군이 이와시미즈 하치만궁에 가서 천황이 내리는 검을 쇼군이 받으면 양이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도쿠가와 이에모치 쇼군이 감기몸살이 나서 예식에 참여하지 못한다"'''라고 핑계를 대서 넘어가게 되었다.
에도로 돌아온 뒤에는 양이거부를 주장하는 막부 내 신료들을 밀어내고 양이 실행책으로 에도와 가까워 서양의 침공이 일어나면 방어에 불리한 요코하마항의 폐쇄를 추진했다. 8월 18일 정변으로 조슈 번을 중심으로 한 존황양이파가 조정에서 밀려나고 공무합체파가 득세했다. 요시노부는 공무합체파와 막부 신료 등이 참여한 참예회의에 참석했지만 이 자리에서도 요코하마항 폐쇄를 놓고 시마즈 히사미쓰와 마쓰다이라 슌가쿠 등과 대립했다.
게다가 8월 18일 정변 이후 사쓰마 번이 조정을 좌지우지 하려는 모습을 보이자, 요시노부는 여기에 반발해 구니노미야 아사히코[10] 가 주관한 연회에서 일부러 만취한 척하며 다테 쇼죠, 마쓰다이라 슌가쿠 등을 맹비난하고 구니노미야에게 "시마즈 같은 것은 얼마든지 있다"라고 폭언을 하는 등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둘 다 공무합체파였지만, 중앙 정계의 정치참여 시도하려던 도자마 다이묘 사쓰마 번과 기존대로 막부가 정권을 좌지우지하려는 요시노부의 대결이었다.
2.2.3. 조정의 관리로서
1864년, 쇼군 후견직에서 교토 궁궐 수위직이 된다. 즉, 막부의 관리에서 조정의 관리가 되었다. 이때부터 교토에 있으면서 막부의 중앙부와는 독립된 자신의 파벌을 형성해나가는 한편, 막부 내에는 정사총재직을 맡은 카와고에 번주와 연계해 요코하마항 폐쇄를 계속 추진해 나갔다. 하지만 텐구당의 난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막부 내 신료들의 갈등이 일어나, 결국 카와고에 번주는 정사총재직에서 물러났고 요코하마항 폐쇄는 사실상 좌절로 돌아갔다.
1864년 7월, 금문의 변이 일어나자 궁궐 수위직인 요시노부는 직접 수비군을 지휘해 타카츠카사 저택(鷹司邸)를 점령한 조슈군과 맞서 싸웠다. 이때의 일로 요시노부는 '''도쿠가와 막부 쇼군 중 유일하게 말에 타지 않고 싸운 쇼군'''이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금문의 변 전까지는 요시노부는 존왕양이파에 대해 유화적인 입장이었지만, 금문의 변 이후로는 강경한 입장을 취해 반존왕양이파인 아이즈, 구와나와 제휴하기 시작했다. 텐쿠도의 난 처리와 관련해서는 자신을 지지하던 미토 세력을 쳐낼 정도로 냉철함을 보이기도 했다.
제1차 조슈 정벌 이후 서양열강들이 현안이던 안세이 5개국 조약의 비준을 위해 조정과 협상을 벌였다.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자 자신의 할복까지 거론하면서 강경한 입장을 취한 끝에, 결국 천황으로부터 조약비준의 칙령을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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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제2차 조슈 정벌 을 위해 다시 출전하지만 이때는 사쓰마 번이 조슈 번과 동맹을 맺고 출전을 거부한 탓에 막부군은 쵸슈군에게 패배했다. 7월 20일, 이에모치가 오사카성에서 사망했고, 요시노부는 조정에 요청해 조슈와의 휴전을 이끌어냈다.
2.3. 쇼군 취임 후
2.3.1. 쇼군 시절
이에모치는 6촌 동생인 도쿠가와 이에사토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로쥬(老中) 이타쿠라 카츠키요와 오가사와라 나가미치는 에도의 반대 여론을 억누르고 요시노부를 쇼군으로 밀었다. 그러나 요시노부는 도쿠가와 종가는 계승했지만 쇼군직은 계속 거부했다. 요시노부가 쇼군직을 거부한 데는 욕심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이에사토를 지지하는 오오쿠(텐쇼인)와 미토번을 중심으로 한 반(反) 요시노부 세력 때문이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결국 12월 20일, 조정에서 쇼군임명 칙지를 받아 겨우 취임했다. 조정의 권위를 통해 반대세력을 잠재우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쇼군과는 달리, 요시노부는 '''조정과의 긴밀한 연계'''를 바탕으로 국정을 운영했기 때문에 자연히 에도가 아닌 교토를 중심으로 한 키나이가 정권의 중심이 되었다. 실제로 이 시절 에도에 있던 막부의 신료 대부분은 키나이로 상경해야 했다. 한편으로 자신과 대립하는 관계에 있던 막부의 개혁파 오구리 타다마사와 제휴해 소위 케이오의 개혁이라는 정책을 추진했다.
프랑스로부터[11] 240만 달러의 원조차관을 받아내는 데 성공하고 요코스카에 제철소를 건립했으며 조선소도 건설하려고 했다.[12] 또한 프랑스로부터 군사고문단을 초빙해 군제개혁을 추진했으며 관제개혁을 추진해 육군총재(장관), 해군총재, 회계총재, 국내사무 총재, 외국 사무 총재를 신설했으며 노중의 월번제를 폐지했다. 동생을 프랑스로 파견해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여하게 하는 등 막부 신료들을 해외로 보내 근대문물을 보고 오도록 권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대 쇼군 때부터 교토와 가까운 위치에 있어서 조정이 개항을 반대해왔던 효고항 개항 문제는 조정에 집요한 요구를 해서 칙허를 받아냈고, 이를 빌미로 요시노부로부터 정치의 주도권을 빼앗기 위해 무단으로 효고항 개항을 선언했다고 요시노부를 탄핵하기 위해 모인 사츠마, 에치젠, 토사, 우와지마의 소위 4후회의(四侯会議)를 해산시킴으로써 정치적 반대 세력을 억눌렀다.
군사면에서는 근대식 군대를 육성하기 위해, 요코하마에 훈련소를 설치하고 당시 세계 최강이라고 평가받던 프랑스 육군의 장교를 데려와서 고문단을 꾸리고,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약 2만 4천명의 군인들을 양병했다. 막부육군 문서 참조.
요시노부도 토막파도 일본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근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조타수를 누가 쥐느냐의 문제였다. 쇼군 요시노부는 막부가 주도하길 원했고, 사이고, 오쿠보 등의 토막파 하급무사들은 신분 차별을 받고 자랐기에, 서양처럼 평등한 시민 계급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막부는 무력을 써서라도 타도해야 할 대상이었다.
공무합체운동이 좌절되고 토막파가 권력을 잡은 사쓰마는 조슈와 동맹을 맺고, 무력으로 막부 타도를 시도하려 하자 '''전쟁을 피하기 위한 목적'''에서 1867년 10월 14일, 막부의 국정 운영권을 천황에게 반환한다는 상주문을 메이지 덴노에게 올려 다음날 윤허를 받았다.(대정봉환) 하지만 요시노부는 권력을 내놓을 생각이 없었고 수백 년간 실권이 없던 탓에 천황이 직접 국정운영을 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해 제후회의를 도쿠가와에서 주도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2.3.2. 왕정 복고와 실각
그러나 오쿠보 도시미치와 이와쿠라 토모미는 막부타도를 위해 메이지 덴노를 설득, 그해 12월 왕정복고령을 선포하게 했다. 제후회의를 주관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놓지 않으려던 요시노부에게는 내대신 사직과 막부령 반납의 명령이 내려졌다. 요시노부는 일단 충돌을 피하기 위해 오사카성으로 옮겼지만 각국 공사들을 오사카성으로 불러 막부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한편으로 조정에는 내대신 사직과 막부령 반납의 조치를 좀더 늦추려고 여러 경로를 통해 애썼다.
하지만 내외적으로 과격파들이 문제였다. 사츠마는 어떻게든 막부를 도발하여 전쟁을 벌이려고 했고, 막부 가신들은 조정을 등에 업은 사츠마-쵸슈 세력을 토벌해야 한다고 맞섰다. 요시노부는 어떻게든 무력충돌을 피하려고 했으나 사쓰마가 에도 시내에서 벌인 테러사건에 분노한 막부 과격파들이 사쓰마 번저를 방화, 소실시켜버렸다. 결국 이 사건으로 결국 무력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별 수 없이 요시노부는 아이즈번과 쿠와나번에 동원령을 내리고 막부 육군, 신선조와 교토순찰조를 동원하여 쿄토를 포위하고 시내로 진입을 시도한다. 이것이 세간에 알려진 토바 후시미 전투이다.
원래 요시노부는 조정에 진입하여 토막파를 체포하거나 몰아내고 조정을 장악한 다음, 사츠마 토벌의 선지를 받아 정당성을 확보하고 일본 전역에 총동원령을 내려 공격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사츠마-쵸슈, 토사번병의 숫자도 매우 적었고 사츠마는 막부의 전면전 시도에 당황하여 비상시 메이지 덴노를 데리고 탈출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으나…
막부육군 지휘관인 타키가와 하리마노카미의 무능함 탓에 교토 진입은 실패하고 반격을 받아 밀려나게 된다. 처음부터 요시노부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끌려들어간 이 전쟁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는데 패전소식이 들려오자 이때다 하고 오사카성에서 전함을 타고 에도로 탈출해버린다. 오사카성으로 귀환하던 막부 패잔병은 졸지에 적지 한가운데 방치되어버렸고, 이들은 결국 자력으로 에도로 귀환한다.
상황을 보던 서국의 모든 번들이 일제히 조정에 붙어버리고 에도로 진격해오는 과정에서 요시노부는 충분한 군사력이 있었음에도 카츠 카이슈를 협상대표로 내세워 에도성을 무혈개성하고 조정에 항복해버린다.[13] 이미 역적으로 추토령이 내려져 있었음에도 사실상 무조건 항복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았고 슨푸성으로 옮겨져 당분간 그곳에서 지냈다.[14]
2.4.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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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년 9월, 메이지 덴노의 보신전쟁 종료선언에 따라 근신이 해제되어 슨푸성을 시즈오카로 개명하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사냥과 낚시, 바둑, 사진 등의 취미에 몰두하면서 정치적 야심은 드러내지 않았다.
1897년에는 도쿄 스가모로 옮겨갔으며 이듬해에는 황실의 중재로 메이지 덴노를 오랜만에 만났다. 1902년에는 귀족원 의원으로 오랜만에 정치에 복귀했고 1910년에 7남 요시히사(慶久)에게 귀족원 의원을 물려줄 때까지 8년여간 활동했다. 이후 다시 은거했고 1913년 만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5. 기타
충분히 싸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시노부가 끝내 싸움을 포기한 데 대해서 여러 가지 추측이 일었는데,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요시노부 정권이 기본적으로 '''천황의 권위에 기반한''' 정권이었고, 천황의 권위가 이제 토막파에게 넘어가면서 정치생명이 끊어지게 됨에 따라 요시노부가 모든 걸 포기하게 된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요시노부가 덴노와 토막파를 쓰러뜨린 뒤엔 뭘 어찌해야 될지를 몰라서 알아서 포기해버린거라는 주장도 있다. 여하간 이 정도라서 어쩌면 최소한의 체면은 지켰을지도 모른다.
연구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요시노부는 천성부터 천황에게 약했다고 한다. 천황이 나서면 아무 말도 못 하게 되는데, 그가 태어나고 자란 미토 번은 미토학의 영향으로 존황사상이 강한 지역이었고, 그의 친부 나리아키도 열렬한 존황양이론자였고 어머니가 황실의 4대 세습친왕가 중 하나인 아리스가와노미야케의 일원이었다.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고산케를 구상할 때, 미토 번은 천황 가와 연결시켜 에도 막부가 망할 때를 대비해서 막부가 망하더라도 천황 가의 편에 서서 가문을 이어가기 위한 일종의 보험이었다. 그런데 미토 번 출신의 요시노부가 쇼군이 되고, 조적(역적)으로 몰린 것은 요시노부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런 의미로 따지자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만든 보험이 긍정적인 의미로 작용했다 볼 수도 있다.
3. 가정
도쿠가와 종가와는 따로 떨어져 새롭게 도쿠가와 요시노부 가문을 창설했다. 정실 도쿠가와 미카코(德川美賀子)[15] 외에도 측실로 잇시키 스가(一色須賀), 신무라 노부(新村信), 나카네 사치(中根幸), 요시(芳) 등을 두고 총 10남 11녀를 낳았다.
7남 요시히사의 차녀 도쿠가와 키쿠코는 다이쇼 덴노의 셋째며느리가 되었으나, 자녀를 낳지는 못했다. 남편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이 동성애자라서 그랬다는 소문이 있다.
가문은 증손자인 요시토모(慶朝, 1950-2017) 때까지 이어졌고, 요시토모에게 자녀는 있었으나 전 부인과 이혼을 할 당시 자녀들이 어머니를 따라가 도쿠가와 가문을 이탈했기 때문에, 요시노부의 가문은 끊어졌다. 현재는 도쿠가와 종가가 도쿠가와 가문 전체를 대표하고 있다.[16]
증손녀 마사코(眞佐子, 1944-) 는 히라누마 기이치로 전 일본 내각총리대신의 양손자 히라누마 다케오와 결혼했다.
4. 평가
에도 막부의 마지막 쇼군이라 이미지는 썩 안 좋지만[17] 의외로 유능했던 인물이었다. 카츠라 코고로는 이에야스의 재림이라고 평가했고, 사카모토 료마도 대정봉환 이후에 요시노부가 정권을 주도하는것을 구상했을 정도였다.[18] 실제로 타임슬립 닥터 진이나 바람의 빛 같은 막부 말기를 다룬 만화에서도 취급이 좋다. 특히 바람의 빛에서의 요시노부는 그야말로 상당히 유쾌한 청년. 하지만 요시노부가 모티브로 추정되는 은혼의 히토츠바시 노부노부는 취급이 영 좋지 않다.
다만 보신전쟁 때 '''너무 쉽게 전쟁을 포기했다'''라며 아군(구 막부군)은 물론 적군(신정부군)에게까지 비난을 받았다.[19]
더욱이 도쿠가와 이에야스 때부터 내려오던 금부채 우마지루시는 잃어버렸는데도 '''애첩은 소중히 챙겨와서''' 더 욕을 먹은 부분이 있다. 그러나 어차피 막부 중심의 개혁이라는 건 조선의 동도서기에서 보듯이 한계가 명백했던 데다 서방 여러 국가들이 본격적인 개입을 준비하는 상황에서 전쟁을 지속할 경우 후에 일어날 일은 일본의 식민지화였으니[20] 대국을 고려하여 포기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다만 그런 식으로라면 본인이 쇼군이었으므로 아예 그 자리에서 개혁을 수행하면 그만 아니냐, 혹은 요시노부가 진심으로 대정봉환의 의사가 있었다면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알아서 다 바치고 기었으면 되므로 보신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그에 대한 평가도 이런 복잡한 측면 때문에 극과 극을 달리는데, 아는 건 많지만 유약한 엘리트이거나 심하면 약삭빠르고 치졸한 배신자로 묘사될 때도 있고, 고도의 정치적 감각을 보유한 현자로 묘사될 때도 있다. 강경파가 많았던 막부측 인사들은 후일 막부를 엎고 수만 명의 신하(특히 아이즈 번)를 희생시킨 주제에 홀로 유유자적하게 취미생활을 즐기며 우아한 신사로 인생을 마친 그를 경멸해, 그의 이야기가 나오면 불쾌감을 숨기지 않거나 아예 일체의 연락을 끊은 사람도 있다고 한다.[21] 하지만 대체적인 평가는 시대를 제대로 읽고 현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인 인물. 만일 요시노부가 권력을 탐하여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끝까지 내전을 벌였다면 메이지 유신과 일본의 근대화는 더욱 늦춰졌을 것이며 아예 실패로 끝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막부를 없애고 신정부를 수립하면서 요시노부의 목숨을 앗아가려고 한 유신 삼걸(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은 비참하게 요절했으나[22] , 정작 요시노부 본인은 다이쇼 시대까지 살면서 그 천수를 누렸다.
5. 대중매체에서
일본 근대사를 다룬 사극에선 단골로 등장하는데, NHK 대하드라마에선 1968년 <료마가 간다>부터 2021년 <청천을 찔러라>까지 총 11편이나 등장했다. 대하드라마에서 최초로 이 역할을 맡은 이는 가부키 배우 오노에 타츠노스케(초대)이며, 이후 츠가와 마사히코, 이토 타카오, 모토키 마사히로, 이마이 토모히코, 히라 타케히로, 고이즈미 고타로 등 쟁쟁한 배우들이 이 역할을 거쳤다.
특히 1998년작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그를 주인공으로 했는데, 주연이자 요시노부 역할을 맡은 사람은 모토키 마사히로.[23] 막말시기를 막부와 요시노부의 관점에서 바라본 정치드라마로 아버지인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살아있을 때는 그다지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으며 에도 환락가들을 잠행하는 모습을 보이나 아버지와 정적이었던 이이 나오스케 사후에는 각성하고, 쇼군 후견직에 오르면서는 복잡한 정세 속에도 양이와 개국을 오가는 과감하고도 현실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이에모치 사후에 쇼군이 되어 어떡하든 막부를 지키고자 신헌법 초안을 지시하고 임시방편으로 대정봉환도 단행하나, 대정봉환에 분개한 막부군의 편을 들어 조정에서 역적 취급을 받자 에도로 돌아가며 쇼군직을 사직하고 여생을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
은혼에서 도쿠가와 노부노부의 모티브가 되었다.
2021년 NHK 대하드라마 시리즈인 청천을 찔러라에서는 쿠사나기 츠요시가 배역을 맡는다.
하야시 마리코의 소설 <세고돈>에서도 그를 다뤘고, 이케맨 시리즈의 하나인 러브 인 교토의 등장 캐릭터이다. 도쿠가와 요시노부(이케맨 막말) 참조.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는 갑툭튀한 조선 국왕에 의한 나비효과로 얻은 경제적 반사이익 덕분에 결국은 삿초동맹을 이겼고,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의 자리를 지켰다.
다른 열강과의 불평등조약 때문에, 범아시아 조약기구를 통한 무역으로서만 일본의 산업기반이 유지되는 상황. 거기다 여전한 반막부파의 존재로 인해 이래저래 고민이 많다. 일단 일본을 범아시아 조약기구의 2인자로 유지시키면서, 훗날 일본의 외교적인 입지를 위해 해군력의 증강 및 극동보건기구의 일본 유치, 조약기구 합종군 파견 등의 활동을 하는 중이다.
6. 둘러보기
[1] 에도 막부는 물론이며 일본 막부 역사상 유일하게 사진을 찍은 쇼군이 도쿠가와 요시노부로 알려져있다. 다만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도 사진을 찍었다는 이야기가 있긴 하다. 이에모치 쇼군의 정실부인 카즈노미야 치카코 내친왕(和宮親子內親王)의 무덤을 이장하는 과정에서 이에모치로 추정되는 인물의 사진 유리원판이 발견되었지만, 하루 만에 사진 속의 화상이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2] 흑백 사진 링크.[3] 히토쓰바시 가문은 도쿠가와 모치나가가 계승하였다.[4] 쇼군 재임은 대정봉환과 메이지 유신으로 끊어졌지만, 도쿠가와 가문의 당주 자리는 고산쿄의 일원인 다야스 도쿠가와의 당주 도쿠가와 이에사토가 계승하였다.[5] 도쿠가와 요시노부 가문은 도쿠가와 요시히사가 계승하였다.[6] 아리스가와노미야 오리히토 친왕의 12녀.[7] 다만, 쇼군이 되기 전까지는 이름을 한자독음으로 읽은 '케이키'라고 불렀다.[8] 이때 이에요시의 아들 이에사다가 쇼군이었지만 병약하고 득남도 가망이 안 보였다.[9] 가마쿠라 막부 이래로 수백 년간 국정실무를 담당하는 것에서 멀어진 조정이기 때문이 이를 받아들이기는 매우 어려웠다. 다시 말해서 조정이 국정을 행사하게 된다 해도 경험이 없기 때문에 원만하게 이끌기는 어려웠다는 말.[10]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이방자 비의 아버지),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등의 아버지. 이방자 비와 고준 황후의 할아버지이며, 쇼와 덴노의 장녀 히가시쿠니 시게코의 시할아버지이기도 하다.[11] 영국이 사쓰마 번과 붙자, 라이벌 관계인 프랑스는 에도 막부 편에 섰다. 원래 600만 달러를 빌려달라고 했지만.[12] 시바 료타로가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라고 평가한 막부의 가신 오구리 타다마사가 1865년 14대 쇼군 이에모치에게 허가를 받아 건설했다. 배를 만들기 위한 제철부터 시작해서 각종 부품을 만들기 위한 종합 공장 시설이었다. 프랑스 고문의 지도를 받았지만, 대정봉환으로 실제로 배는 못 만들었다.[13] 이것 때문에 상당수의 막부군이 자력으로 지휘체계를 이탈, 동북부로 탈출해버린다.[14] 막부 해군 총재인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막부의 항복명령을 무시하고 함대를 이끌고 도쿄만에 진주하면서 신정부에 압박을 가했는데, 요시노부에게 위해를 가할 경우 즉시 반격에 나서겠다는 입장이었다. 요시노부가 슨푸성 다이묘로 임명받고 신변이 보장되자, 에노모토는 주군에 대한 의리를 다했다고 여기며 함대를 이끌고 북방으로 탈출한다.[15] 쇼켄 황후의 친정아버지인 이치죠 타다카(一條忠香)의 앙녀.[16] 자녀가 워낙 많았기에 요시노부의 4남 아츠시(厚)와 9남 마코토(誠)가 분가해서 남작이 되었고 그 가문들은 지금까지 건재하지만, 지금와서 요시노부 가문 본가를 잇지는 않는다.[17] 후에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는 선거에서 패배해 '''자민당의 도쿠가와 요시노부'''라고 불렸다.[18] 요시노부가 사카모토 료마의 존재를 알게 된건 아키하루에 들어간 이후였다고 한다. 사카모토 료마의 존재는 메이지 유신 이후에서야 대중들에게 조금씩 알려질 정도로 당대에는 지명도가 낮았다. 메이지 정부 수립 이후에는 1914년 3월 24일에 독일의 지멘스 회사 사건(해군 비리) 때문에 야마모토 곤노효에의 1차 내각이 소멸당하였던 직후로 도쿠가와 가의 인물들 중 (1903년 12월 4일부터 귀족원의장을 맡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사토가 27일에 정식 총리 후보로 출마했으나 2일 이후에는 일본 정부 내각에서 도쿠가와 정권으로 번지는 걸 우려하기 때문에 (그가) 자진 사퇴하였다.(그 직후로는 오쿠마 시게노부의 총리 당선으로 자리잡았음)[19] 실제로도 막부는 다시 싸워 볼 만한 저력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작정하고 캐삭빵 벌였다가는 향후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의 역량을 엄청나게 까먹었을 것이다. 때문에 후대 사람들은 시대의 흐름을 인정하고 퇴장한 요시노부의 결단을 인정해주는 분위기로 흘렀다[20] 중국처럼 스케일이 크지 않았기에 주권을 존중할 필요도 없었다.[21] 이런 구 막부 측 인사의 요시노부 홀대를 잘 보여주는 창작물 캐릭터가 바로 바람의 검심의 시노모리 아오시다. 나름대로 희생을 줄여보려는 생각에 항복했겠지만 그래도 사람이 비겁해 보여 싫다라고 평가했다.[22] 사이고는 세이난 전쟁에서 패배하고 할복자살, 오쿠보는 사족들에 의해 암살, 기도 다카요시는 지병으로 인해 세이난 전쟁의 끝을 보지 못하고 사망.[23] 일본 패망 하루전에서 쇼와 천황 역.